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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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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피니언] 황순원의 10가지 감사노트 - 12월에 드리는 감사 크리스천헤럴드2025.12.03
    1 오늘도 새날을 주시고 오늘 할 일을 강조하시면서 잠을 깨우시는 주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여 들을 수 있어서 감사합니다.2 나는 온전히 죽고 예수님이 내 안에 계심을 인식하고 나를 통해 나타나시기를 갈망하는 마음으로 간청하게 하시니 감사를 드립니다.3 주님은 우리를 죄에서 구하시려고 피를 흘리되 한 방울의 피도 남김없이 몽땅 흘리신 사실이 처음 믿었을 때의 감동에 비해 점점 흐려져 가니 피 흘리기까지 죄와 싸울 전투태세 또한 흐려지고 있습니다. 금년이 다 가기 전에 죄와 더불어 싸우기를 피 흘리기까지 하라는 말씀에 긴장하게 하시니 감사합니다.4 이미 주신 축복을 귀히 여기지 않은 채 함부로 여기다가 누려 보지도 못하고 빼앗기고 말았던 것들이 얼마나 아까운지 지금부터라도 과감하게 결단하고 주신 복과 앞으로 주실 복을 구체적으로 헤아려 기도노트에 작성하며 받을 준비 할 것을 다짐하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5 야곱의 하나님은 특별히 쟁탈자인 야곱을 이스라엘로 바꾸신 하나님이십니다. 야곱을 바꾸신 하나님은 내게도 찾아오셔서 욕심쟁이인 나를 단련하사 이름을 바꾸어 주셨습니다. 이스라엘로 살아갈 것을 다짐하며 감사를 드립니다.6 영화에 주인공을 강조하기 위해 악역이 필요하지만 그렇다고 악역이 죽기를 바라서 없어지면 더 이상 주인공은 할 일이 없어 영화는 막이 내려집니다. 이처럼 나를 괴롭히는 자를 그냥 두시는 것은 주인공인 나를 단련하여 훌륭한 작품을 만들기 위함이기에 내가 맡은 역에만 충성하면 됩니다. 상대방이 어떻게 괴롭히든지 내게 맡겨주신 역할에만 집중하기로 결단하며 감사를 드립니다.7 영적전쟁에서 견고한 진은 완전 패배의 원인제공자입니다. 그러나 이 또한 내가 만들어 낸 것이기에 누구에게 불평이나 책임을 돌릴 수 없습니다. 내 안에 견고한 진이 무엇인가 살피며 무너뜨리기 작전에 나서게 하시니 감사를 드립니다.8 사역자들의 탈진 현상은 자신도 모르는 새 찾아옵니다. 헌신과 희생으로 충성하다 보면 어느새 속은 비어지고 겉으로 부흥하는 사역에만 초점을 두다 보면 자신도 모른 채 순간 쓰러지고 맙니다. 그러기에 수시로 점검하며 속도를 조절할 수 있는 능력이 필수임을 깨닫게 하시니 감사합니다.9 세계정세를 알면 알수록 불안과 공포에 빠질 수밖에 없지만 그 안에서 계획하시고 성취하실 하나님의 플랜을 상기할 때마다 오히려 기대가 되어 더 주님을 의지할 수 있어서 감사를 드립니다.10 하나님은 누구보다도 나 자신을 소중히 여겨서 항상 시선을 내게로 돌리고 집중하시는 분이십니다. 그 하나님과 더욱 친밀한 관계로 들어가기 위해 오늘도 나에게 애타게 간청하시는 음성을 듣고 마음에 결단하며 행동으로 옮길 수 있도록 강권해 주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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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36
    [오피니언] The letter 17 김광근 - 나의 정체성을 회복하라 크리스천헤럴드2025.12.03
    삶은 때때로 나는 누구인가?" 라는 질문 앞에 우리를 세움니다. 세상은 직업, 역할, 성과, 혹은 과거의 상처로 우리를 정의하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단순하면서도 결정적인 한 문장으로 우리를 규정하십니다 "너는 내 것이라."사도 바울은 누가 옳으냐는 문제보다 더 본질적인 사실을 상기시컵니다. 바로 우리가 사나 죽으나 주님의 것이라는 정체성입니다 이 고백이 마음에 새겨질 때, 우리는 흔들리는 자존감 속에서도 담대해지고, 세상의 소리에 휘둘리지 않게 됩니다.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자신의 생명을 내어주셨고, 그 피로 우리를 사셨습니다. 우리는 더 이상 내 뜻과 내 영광을 위해 사는 자들이 아닙니다 주님의 소유로, 주님의 기쁨을 위하여 살아가는 존재입니다이 진리를 기억하면, 오늘 우리의 작은 선택 하나에도 방향이 생깁니다. "우리의 말이 주님께 영광이 될까?' "우리의 크고 작은 결정들이 주님께 드려질 수 있을까?"하루를 시작하며 이렇게 고백해 보십시오 "살든지 죽든지, 나는 주님의 것입니다." 이 고백은 단순한 신앙 표현이 아니라, 우리 삶의 중심을 붙들어 주는 영적 나침반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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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35
    [오피니언] 류응렬 칼럼 - 보이지 않는 빛을 향해 걷는다 크리스천헤럴드2025.12.03
    필라델피아 미술관에서 고흐의 해바라기를 처음 보았을 때의 그 감동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해바라기는 단순히 병 안에 담긴 꽃 그림이 아닙니다. 작가의 힘겨웠던 삶, 햇살, 사랑, 죽음과 자아까지 나타내며 한 사람의 인생 전부를 엿보게 합니다. 이렇듯 예술 작품은 그 자체 보다 그 작품을 통해 많은 것을 바라보게 합니다. C.S. 루이스가 그리스도인이 된 후에 '순전한 기독교'에서 한 말입니다. “나는 해가 떠오르는 것을 믿듯이 기독교를 믿는다. 해를 보기 때문만이 아니라, 해로 인해 모든 것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태양은 우리에게 자주 보이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구름 뒤에 숨기도 하고, 새벽에는 아직 모습을 드러내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태양이 존재한다는 것을 의심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동녘에 햇살이 떠오르면 온 산천의 색깔이 드러나고, 길 위의 그림자가 태양의 방향을 가리키기 때문입니다.우리 인생도 마찬가집니다. 가장 중요한 것들은 대부분 보이지 않습니다. 공기가 보이지 않아도 우리의 폐를 채우고, 중력이 보이지 않아도 우리의 발걸음을 붙들고 있습니다. 사랑은 손으로 잡을 수 없지만 그 보이지 않는 힘이 사람을 살리고 가정을 지키며, 한 인간의 일평생을 흔들어 놓습니다. 조용한 새벽에 깨어나 홀로 거실에 앉아 차를 마시다 보면 문득 보이지 않게 내 삶을 이끌어 온 많은 것들이 떠오르기도 합니다. 누군가를 끝까지 신뢰했던 이유, 용서할 수 없던 사람을 용서하게 했던 힘, 낙심 중에도 이상할 정도로 다시 일어서게 했던 용기. 이 모든 것은 어떤 형태도 색채도 없지만 그 무엇보다 거대한 울림으로 우리 삶을 움직여 왔습니다.하나님을 향한 믿음도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모습을 본 사람은 없지만, 우리는 주님의 빛 앞에서 수없이 그분의 존재를 깨닫습니다. 평범하게 읽던 말씀이 어느 날 내 마음을 흔들고 들어오는 순간, 기도 중 이유 없이 차오르던 눈물, 절망의 골짜기에서 갑자기 길이 열리던 경험. 이 모든 것은 눈에 보이는 빛이 아니라 나의 삶을 비추는 빛입니다. 시편 기자도 이 사실을 고백합니다. “진실로 생명의 원천이 주께 있사오니 주의 빛 안에서 우리가 빛을 보리이다 (시편 36:9).” 바울도 우리에게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이 영원하다고 강조합니다. 눈에 보이는 것을 향해 달려가는 세상에서 성경의 가르침도 루이스의 말도 우리를 향한 조용한 초대처럼 들립니다. “눈에 보이는 것으로만 살지 말라. 세상을 비추는 빛을 보라.” 아름다운 가을날에 우리 손을 붙들고 계시는 주님을 마음에 깊이 모시면 좋겠습니다. 보이지 않지만, 나뭇잎이 흔들릴 때 바람이 지나가듯이 조용히 주님의 이름을 불러보면 남모를 위로를 받게 될 것입니다. 환경을 뛰어넘는 힘을 얻고 소망의 노래를 부를 수 있을 겁니다. 이런 사람은 내 안에 진정한 빛이신 주님을 바라보며 함께 걸어갈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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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34
    [오피니언] 정재영 칼럼 - 교회가 아닌 마을 중심의 돌봄 실천 크리스천헤럴드2025.12.03
    최근 돌봄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인간은 살아가면서 반드시 누군가에게 돌봄을 주고, 돌봄을 받는 시기를 거친다. 누군가에게 돌봄을 받고 누군가를 돌보는, 돌봄 관계의 변화 속에서 우리 삶은 구성된다. 이렇게 인간의 삶에서 돌봄은 필수불가결한 것이기 때문에 인간 존재 자체를 ‘돌봄의 인간’으로 상정한다. 특히 우리 사회에서 고령화가 급속하게 진행 중이고, 노인이나 만성질환자, 장애인 등 돌봄이 필요한 인구가 점차 증가하고 있는 상황에서 돌봄에 대한 필요성이 더욱 강조되고 있다. 그래서 돌봄이 사회윤리, 정의의 기초가 돼야 하고, 돌봄을 중심으로 사회가 재구성돼야 한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이러한 점에서 사회도 ‘돌봄 사회’로 이해된다. 돌봄 사회는 돌봄 관계를 기반으로 하는 사회이며, 동시에 돌봄 관계에 중요한 가치를 부여하는 사회다. 여기에는 돌봄 관계가 사회를 구성하는 기초가 된다는 생각이 깔려 있다. 이런 관점에서 만약 돌봄이 배제된다면 자유민주주의든 사회민주주의든 전부 허상에 불과한 것이다. 그래서 돌봄이 기초가 되는 돌봄 민주주의가 강조되고, 복지국가를 넘어 돌봄 민주국가가 돼야 한다고 주장된다. 이런 점에서 돌봄 민주 국가는 새로운 모습의 복지국가이며, 돌봄의 가치와 돌봄 관계를 지원하고 반영하는 국가로서 더 정의로운 복지국가, 더 나은 복지국가로 불리게 된다.이렇게 돌봄에 대한 사회적 책임을 더 강화하기 위해서 우리나라에서도 ‘통합돌봄지원법’이 내년에 시행될 예정이다. 이 법의 목적은, 기존에 분절되어 제공되던 의료·요양·돌봄·주거·재활·생활지원 등의 서비스들을 통합·연계하고, 돌봄이 필요한 사람들이 ‘살던 곳에서’ 지속 가능한 삶을 영위할 수 있도록 하는 데 있다. 이 법은 새로운 서비스를 만들겠다기보다는, 기존에 흩어져 있던 서비스를 ‘사람 중심’으로 재설계하고, 통합된 전달체계를 만들겠다는 ‘체계적인 틀’을 제공한다는 데 의의가 있다. 기존에는 의료, 요양, 복지, 주거지원 등이 제각각 따로 운영됐다. 그래서 서비스 간 단절이 많아서 필요한 사람에게 필요한 서비스가 제대로 연결되지 않는 문제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배경에서 실천신학대학원대학교 21세기교회연구소와 한국교회탐구센터, 목회데이터연구소가 공동으로 한국 개신교 신자들의 마을 돌봄에 대한 인식 조사를 실시했다. 교회와 신자가 마을 돌봄을 어떻게 인식하고 있는지 그리고 실제로 어느 정도 참여하고 있는지를 파악할 필요가 제기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조사를 통해 지역사회 활동과 돌봄 관련 경험 및 향후 필요 요인을 파악함으로써, 교회 기반의 마을 돌봄 모델을 설계하기 위한 기초자료로 활용할 수 있을 것이다. 더 나아가 교회가 공적 돌봄 체계와 협력해 마을 돌봄 사역 주체로서 역할을 수행할 수 있도록 방향을 제시할 수 있을 것이다.주요 내용을 살펴보면, 먼저 돌봄 수요와 공급의 불일치가 뚜렷했다. 출석교회 생활환경이 ‘열악’하다는 응답은 읍·면 지역에서 더 높았으나 실제 돌봄 사역은 ‘읍‧면’보다 ‘중소도시·대도시’에서 더 많이 일어나고 있었다. 읍‧면 교회는 돌봄 체계 또한 취약해 돌봄 조직·예산·협력 구조 구축률이 가장 낮고, 돌봄 사역 준비 또한 갖추지 못한 비율이 상대적으로 높았다. 곧 돌봄이 가장 필요한 지역이 돌봄 활동을 가장 덜 하고 있으며 가장 준비가 미비한 구조였다. 돌봄이 필요한 지역인 읍·면 교회들은 대부분 소형교회로서 재정·인력·환경의 한계가 클 가능성이 높으므로, 이들이 한계를 극복하고 돌봄 사역에 나설 수 있도록 지역교회들 그리고 도시 교회들과의 연합 활동이 필요하다.주목할 점은 자원이 부족한 소형교회의 분투다. 30명 미만의 소형교회 55%도 마을 돌봄 사역을 실천하고 있었다. 돌봄 예산·조직·체계가 전혀 없는 교회만 따로 보아도 그 중 50%는 필요 시 팀을 모아 비정기적으로 돌봄을 수행하고 있다. 나머지 50%도 ‘완전 비공식적으로’ 즉 체계 없이 자기 힘으로 수행하고 있었는데, 특히 이 비공식 수행 비율은 소형·읍/면 교회일수록 더 높았다. 그런데 소형교회는 지속가능성과 발전 여력이 부족하므로, 현재 돌봄을 감당하고 있는 소형교회에 대해 중대형교회들의 재정·물적 지원이 요구된다. 중대형 교회의 재정·물적 자원과 소형교회의 지역사회 정보력·현장 접근성을 결합하여, 함께 하는 돌봄 사역의 연대의 장을 마련할 필요가 있다.교회들의 돌봄 사역 방식에 대한 인식 변화도 나타났다. 마을 돌봄 실행 방식 선호에서 협력 선호 76%, 교회 단독 14%로 압도적 차이를 보인 것이다. 돌봄통합지원법체계 내 역할 인식도 ‘필요 시 부분 참여’ 63%가 우세하여 사회적 돌봄을 교회가 단독으로 실천하는 방식보다는 연계 방식을 더욱 선호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따라서 독자적으로 돌봄 사역을 감당하기 어려운 중소형교회들을 위해 실행 가능한 협력형 모델 제시가 필요하다. 지자체·복지기관·NGO 등과 연계 가능한 표준 매뉴얼과 우수 사례를 수집·공유하여, 교회가 무리 없이 협력 사역에 진입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할 필요가 있다.그런데 이번 조사에서는 마을 돌봄에 대한 교회 중심의 사고가 강하게 드러났다. 마을 돌봄의 긍정적 효과에 대해서 가장 높은 항목은 ‘지역사회 신뢰 획득’ 45%로 ‘돌봄이 필요한 이웃의 삶의 질 향상’(37%)보다 더 높았다. 곧 수요자보다 교회 쪽 이익을 더 먼저 인식하는 경향이 나타난 것이다. 돌봄과 교회 성장의 관계에서도 ‘돌봄이 성장에 직간접으로 기여’한다는 인식이 91%로 나타난 것도 돌봄 사역이 수요자 중심보다는 교회의 이미지 향상이나 성장 수단으로 해석될 가능성이 있다. 돌봄 교육과 설교, 훈련에서는 ‘교회에 유익한 돌봄’이 아니라 ‘이웃 사랑’에 초점을 둬야 한다. 따라서 관점의 전환이 일어나야 한다.또한 돌봄 대상 주요 연령대는 노년, 돌봄 대상 부류는 독거노인, 주요 돌봄 활동은 빈곤층 돕기가 가장 높게 나왔다. 마을 돌봄을 취약층 중심으로 생각하고 전통적인 구제/봉사 활동으로 보는 시각이 나타나는 것이다. 돌봄의 대상은 지역사회의 모든 주민이 될 수 있고, GDP 3만 불이 넘는 시대에 전통적인 취약계층은 점점 줄어들고 있다. 육체적 돌봄뿐만 아니라 정신적 돌봄이 필요한 모든 사람에게 관심이 필요하다. 따라서 교회의 한정된 자원을 지역 사회에 베푸는 시혜적 방식이 아니라 지역사회의 자원들이 교회를 통해서 연결되고 협력 활동이 이뤄짐으로써 마을을 공동체화 하는데 교회가 플랫폼 역할을 하는 것이 중요함을 알 수 있다.이번 조사에서는 한국교회 위기 극복 방안에 대해 ‘예배·교육’ 486% 다음으로 ‘마을 돌봄’이 32%로 2위로 나타났다. 특히 시민의식이 높을수록 돌봄을 위기 해법으로 보았고, 생활환경 열악 지역 성도일수록 돌봄을 위기 극복 방법으로 선택했다. 이것은 돌봄을 ‘사회봉사’가 아니라 교회 신뢰 회복과 사회 신뢰도 회복, 현재의 교회 위기에 대한 대응 전략으로 인식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마을 돌봄을 단순히 교회의 이미지 개선을 위해서 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지만 진정성 있게 마을 돌봄을 실천할 때 결과적으로 교회는 우리 사회에서 신뢰를 얻는 종교 단체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돌봄을 교회가 감당해야 할 마땅한 이웃 사랑의 실천으로 이해하고 적극 참여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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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33
    [오피니언] 김철영 칼럼 - 우리 아이들, 스마트폰 과의존에서 벗어나게 해야 크리스천헤럴드2025.12.03
    AI시대가 도래했다. 제4차산업혁명을 이끄는 가장 강력한 도구다. 모든 문제를 챗GPT 등에 물어본다. 심지어는 수도권 유명 대학들 중간고사에서 AI를 활용해 답안을 작성한 것이 드러나 문제가 되었다. 인터넷과 스마트폰에 과다하게 의존하는 시대가 된 것이다.문제는 자라나는 우리의 아이들이다. 여성가족부(성평등가족부로 개칭됨)가 지난 5월 여성가족부(성평등가족부) 여성가족부는 5월 18일 전국 학령 전환기 청소년(초 4학년, 중 1학년, 고 1학년)과 보호자(초 1학년) 147만여 명이 참여한 「2025년 청소년 미디어 이용습관 진단조사」(이하 ‘진단조사’) 결과를 발표했다.그 조사 결과에 의하면, 인터넷·스마트폰 과다 사용으로 일상생활에 지장을 받는 청소년(초4, 중1, 고1)은 ’25년 213,243명으로 파악됐다. ’24년 221,029명에 비해서는 조금 낮아진 숫자다. 하지만 일상생활에 지장을 받을 정도로 인터넷과 스마트폰에 몰입한다는 것은 심각한 문제를 초래할 수 있다는 것이다.이런 청소년을 ‘인터넷·스마트폰 과의존 위험군’이라고 한다. ‘과의존 위험군’은 위험사용자군과 주의사용자군을 총칭하는 용어로 ‘위험사용자군’은 일상생활에서 어려움을 겪고 있어 전문기관의 도움이 필요한 수준을 말한다. 그리고 ‘주의사용자군’은 사용 시간이 늘어나 자기조절에 어려움이 있어 주의가 필요한 수준을 의미한다.그 조사에서 인터넷과 스마트폰 두 가지 문제를 모두 갖고 있는 중복위험군청소년은 78,943명으로 나타났다. 여기서 ‘중복위험군’이란 인터넷 과의존 위험군이면서 스마트폰도 과의존 위험군인 청소년을 말한다.학년별 과의존 위험군 수는 중학생(85,487명), 고등학생(70,527명), 초등학생(57,229명) 순으로 많았다. 과의존 위험군 남자 청소년은 116,414명, 여자 청소년은 96,829명으로 남자 청소년이 여자 청소년보다 많았다. 특히 초등 1학년의 스마트폰 이용 습관은 보호자가 참여하는 관찰조사로 진행한 결과 정해진 이용 시간을 준수하는 데 어려움을 겪거나 시력·자세 등에 안 좋은 영향이 있는 등 사용 지도가 필요한 수준을 의미하는 ‘스마트폰 과의존 관심군’은 총 13,211명으로 파악됐다.여성가족부는 미디어 과의존의 위험에 노출된 청소년에 대하여 보호자의 동의를 받아 청소년상담기관과 연계하여 미디어 과의존 정도에 따라 상담, 병원치료,치유프로그램, 부모 교육 등 맞춤형 치유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고 밝혔다. 또한 집중 치유가 필요한 청소년은 미디어 사용이 제한된 환경에서 전문상담과 다양한 대안 활동 등을 제공하는 기숙형 치유캠프 프로그램을 지원하고 있다고 밝혔다.지난 2013년 11월 세계성시화운동본부와 한국기독교공공정책협의회가 여야 기독국회의원들과 함께 ‘중독 없는 대한민국 만들기운동’을 시작했다, 당시 보건복지부 조사 자료에 의하면 인터넷과 스마트폰 과다 이용으로 인한 학습기회 손실비용은 무려 1조5천억 원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학습능력 상실은 물론 불안장애, 학폭, 왕따, 불안장애 등 심각한 후유증을 낳는다고 했다.갈수록 인터넷과 스마트폰 이용률이 높아져가고 있는 시대에 교회가 적극적으로 나서서 우리 자녀들을 기도와 말씀으로 양육하고, 올바른 인터넷과 스마트폰 이용 방법을 교육해야 한다. 하나님보다 집착하고 사랑하는 것은 우상이라는 것을 인식하게 해야 한다. 무엇보다 인터넷과 스마트폰을 다스릴 뿐만 아니라 전자 기기를 선교의 도구로 활용할 수 있는 AI선교사로 양성하는 것이 필요하다.마침, 콘텐츠문화연구소 ‘웨이커스’와 세계성시화운동본부, 칼빈대학교, 한동대 VIS센터가 공동으로 내년 2월 3일부터 5일까지 안산동산교회 대부도 엔케렘수양관에서 한국교회 최초로 ‘제8회 청소년 AI 드림캠프’를 개최한다. 청소년들이 AI를 활용해 복음의 전령사 역할을 감당할 수 있도록 한국 교회가 적극 지원해주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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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32
    [오피니언] 이효상 컬럼 - 살다보니 사람이 보이네 크리스천헤럴드2025.12.03
    살다보니 사람이 보이기 시작한다. 젊었을 때는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에 마음을 빼앗기곤 했다. 높은 자리에 감탄하기도 하고, 많은 가진 재산을 과시하는 모습에 부러워하기도 했다. 하지만 세월이 쌓이면서 알게 된다. 사람을 가르는 건 그가 지닌 마음의 무게와 삶의 태도라는 것을.살다보니 알겠더라. 인간관계도 어느 순간이더라. 살다보니 생각도 깊어지고 보이는 게 많아졌다. 영원한 인연도 없고, 영원한 사람도 없고, 영원한 아픔도 없다. 떠날 사람은 억지로 잡아도 떠나고, 남을 사람은 애쓰지 않아도 남는다. 바람이 불면 지나 갈 것은 바람따라 사라지고, 바위처럼 남을 것은 남아 있다.살다보니 사람이 다르게 보인다. 특히 눈앞에 이익만 쫒는 욕심많은 사람, 기본적인 약속의 소중함을 모르는 사람, 부정적인 감정을 쏟아내는 사람은 결국 갈등만 생기고 오래가지는 못하더라. 타인을 이용하기 위해 이리저리 옮겨 다니지만 결국 주위에서 신뢰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닫는다. 잔머리로 사람을 이용하기 위해 상황 따라 말을 바꾸고, 손바닥 뒤집듯 약속을 헌신짝처럼 여기며 자신의 잔꾀를 믿고 살아가는 3류 야바위꾼처럼 행동하는 이도 오래가지 못한다. 사람의 마음은 의외로 단순해서, 진실을 향한 감각만큼은 쉽게 속아 넘어가지 않는다. 응기응변으로 거짓말을 일삼는 사람은 희망을 잃는다. 순간은 모면할지 몰라도 결국 신뢰를 잃고, 신뢰 없는 삶은 마른 땅에 씨를 뿌리는 것과 같다. 살다보니 인간관계도 달라진다. 인간관계가 많고 바쁜 것이 결코 행복도 아니고 시간이 지남에 따라 끊어진다. 가까이 지내던 지인도 이사 가면 잊혀지고, 직장에서 만난 이도 퇴직하면 멀어진다. 돈으로 엮였던 관계는 이익에 따라 사라진다. 사람을 잃기도 하고, 배신을 당해보기도 하면서 겉모습만 보고 사람을 단정하면 안 되겠다 다짐하게 된다. 살다보니 사람을 대할 때 외면이 아니라 내면을 보게 된다. 사람은 겉모습이 아니라 그가 쌓아온 시간, 살아내는 삶의 진솔한 태도나 말이 아닌 행동에서, 웃음 뒤에 숨겨진 고독함에서, 말 한마디 손길 하나에 담긴 진심에서 그 사람의 삶이 읽혀진다. 참 괜찮은 사람, 참 고마운 사람, 그 사람 때문에 다른 사람이 행복한 사람, 오래도록 함께 해주고 싶은 사람, 미치도록 보고 싶은 사람 등 이런 사람 한명쯤은 있어야 살맛나는 인생이더라. 살다보니 사람의 깊이가 보인다. 사람이 살아가는 모습도 형편에 따라 가지각색이기에 그 마음이 읽혀진다. 타인의 외로움 역시 그렇다. 짝이 없어 혼자 사는 것도 서럽겠지만, 함께 있음에도 정을 나누지 못하고 서로의 마음 문을 닫아버린 삶은 그보다 더 괴로운 일이다. 함께 있음이 우연이나 웬수가 아닌 서로에게 축복이 되게 해야 한다. 지금 내 곁에 있는 그 사람과 같이, 그의 편이 되어 거창하지 않고 차 한 잔 앞에 두고 소소한 웃음을 나눌 수 있음에 행복하다는 것을 알겠더라. 5년이 지나고 10년이 되어도 변함없이 지지하고 응원해주며 동행해주는 사람 말이다. 결국 삶은 그런 사람으로 채워지고, 사람을 통해 아픔은 비워진다. 조금 부족해도 내가 미워하는 사람이 없도록, 조금 모자라도 나를 미워하는 사람이 없도록, 조금 서운해도 내가 어떤 사람이 되는가에 따라, 시간이 지남에도 묵묵히 내 곁을 지켜주는 사람들의 모습에 따라 달라진다. 그래서 오늘도 스스로를 돌아본다. 나는 누군가에게 어떤 사람으로 보여지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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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피니언] 김병학 목사의 소통하는 교회 - 소통은 생명을 잇는 길이다 크리스천헤럴드2025.11.17
    한국은 이미 인구 감소의 길로 들어섰다. 통계청에 따르면, 한국의 총인구는 2025년 약 5,167만 명으로 집계되었으며, 향후 10년에는 약 5,071만 명, 20년 뒤에는 약 4,797만 명까지 줄어들 가능성이 있다. 이는 출산율 저하와 급격한 고령화에 기인한 구조적 변화이다. 실제로 최근 청년층의 종교 소속 역시 급감하고 있다. 예컨대, 20대와 30대에서 기독교인 비율은 각각 9 %, 11 % 수준으로 전체 국민 대비 현저히 낮다. 이러한 사회 변화는 단지 숫자의 변화에 그치지 않고, ‘세대 단절’이라는 교회 내부의 미래 위기를 뜻한다.그렇다면 교회는 이 현실을 얼마나 깊이 인식하고 있는가? 많은 교회가 여전히 ‘전도’와 ‘선교’라는 미션에 집중해 왔다. 새로운 교회를 세우고 해외 선교지를 확장하며 영혼 구원에 열심이었다. 그러나 출산·육아·가정이라는 ‘생명의 연속성’과 ‘세대 계승’이라는 과제에는 상대적으로 소극적이었다. 교회가 영적 생명에는 관심이 많았지만, 물리적·사회적 생명 곧 ‘아이 낳고 기르는 문화’에는 충분한 대안을 마련하지 못했다는 비판이 가능하다.더욱이 교회 내부에는 젊은 세대가 떠나는 현실이 있다. 조사에 따르면, 청년대학부 인원은 2014년 약 16만 2734명에서 2022년 11만 4222명으로 8년 새 약 30 %가 감소했다. 그 이유로는 단지 사회적 피로감이나 경제적 부담만이 아니라, 교회 문화에 대한 젊은 층의 실망감이 상당하다. ‘목회자의 언행 불일치’, ‘비민주적 의사소통 구조’, ‘끼리끼리 문화’ 등이 이탈 요인으로 나타났다. 또한 젊은이들은 교회가 시대 변화와 삶의 고민을 충분히 반영하지 못한다고 느낀다. 교회가 여전히 과거 권위주의적 리더십 구조에 머물러 있고, 물질적 부와 번영신학에 치우친 모습이 보일 때 신뢰는 흔들린다.이처럼 인구 절벽이라는 외부 현실과 청년 이탈이라는 내부 위기가 교회 앞에 놓여 있다. 그렇다면 교회는 어떤 대응을 해야 할까? 먼저, 교회는 인식의 전환이 필요하다. 인구 감소는 단지 통계적 수치가 아니라 ‘생명을 낳고 기르는 문화’가 위협받고 있다는 신호다. 교회가 이 변화에 눈감아서는 안 된다. 영적 생명과 더불어 생물학적·사회적 생명을 함께 품는 사역이 교회에게 요구된다.다음으로 대응 전략이다. 교회는 세대 간 통합과 소통을 위한 플랫폼을 만들어야 한다. 청년부·주일학교가 단순히 세대별 모임에 머무르지 않고, 젊은이들이 자신의 삶과 신앙을 연결할 수 있는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 또한, 출산·육아 지원 네트워크, 가정 돌봄 사역, 청년 멘토링 프로그램 등 구체적인 생명 문화 사역을 교회 지형 안에 설계해야 한다. 동시에 리더십 구조의 개혁도 중요하다. 재정 투명성 확보, 권위주의 청산, 교회 내 민주적 소통 체계 마련은 신뢰 회복의 첫걸음이다.마지막으로 구체적 움직임이다. 교회는 지역사회와 손잡아야 한다. ‘가족 돌봄 공동체’, ‘지역 아동청소년 센터’, ‘세대 간 멘토링 프로그램’ 등을 통해 교회가 단지 예배당 안의 조직이 아니라 지역사회의 생명 터전이 될 수 있어야 한다. 또한 청년 세대를 단순히 보호해야 할 존재로 보지 말고 ‘교회의 현재’이자 ‘미래 동력’으로 신뢰하고 책임을 나눠야 한다. 청년이 주도하고 책임지는 사역 모델은 교회의 오래된 위기를 극복하는 열쇠가 될 수 있다.이제 질문을 던져본다. “교회는 지금 ‘인구 절벽’이라는 사회적 지형 변화 속에서, 단지 살아남기 위해 분주한 기관이 되어야 할까? 아니면, 생명을 낳고 기르는 생명공동체로서 새로운 비전을 품고 나아가야 할까?” 우리는 후자가 가능하다고 믿어야 한다. 위기는 언제나 기회다. 교회가 스스로를 ‘생명의 공동체’로 재정립할 때, 잃어가는 시대 속에서 잃지 않을 한길이 보인다.지금이 바로 기회이다. 교회가 자신 안에 머물던 구조를 넘어, 세상 속으로 내려가고 관계 속으로 들어가는 공동체로 거듭날 때, 청년들은 다시 돌아오고 아이들의 울음소리는 다시 예배당에 스며들 수 있다. 생명은 숫자가 아니라 흐름이다. 교회가 그 흐름을 품을 수 있다면, 인구 절벽이라는 어둡고 높은 파도 속에서도 한줄기 빛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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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피니언] 조영석 목사의 생각하며 기도하며 - 재 건 크리스천헤럴드2025.11.17
    오래된 보일러에서 샌 물로 인해 문제가 생겼다. 보일러 주위는 물론, 화장실과 복도 바닥까지 물이 스며들어 곳곳이 썩고 망가졌다. 보험회사에서 나와 점검 후 대대적인 공사가 시작됐다. 보수 공사를 위해 벽안이 훤히 들여다 보일 정도로 다 부수고 뜯어냈다. 그제서야 사태의 심각성을 알 수 있었다. 이미 오랫동안 누수가 진행되고 있었고, 보이지 않는 벽안속에는 나무와 석고판이 썩고 곰팡이가 쓸고 있었다. 물은 아래로 흘러 바닥까지 훼손시켰다. 문제의 원인은 누수이지만 보일러에서 물이 새는 것을 몰랐다는 것이 더 큰 화근이었다. 하필이면 시야가 가린 보일러 뒤쪽에서 물이 새어 오랫동안 벽속까지 서서히 스며들어 피해가 컸다. 누수현상을 초기에 알았다면 큰 피해를 막을 수 있었지만 피해가 표면으로 드러나기 전까지 전혀 몰랐다. 곰팡이를 그대로 방치해 두면 다른 곳으로 전이되어 벽 전체로 퍼진다. 겉으로는 멀쩡해 보여도 안에서는 사람의 생명을 위협하는 독소를 키우게 된다. 곰팡이는 담배보다 더 해로워 장시간 동안 노출되어 있으면 건강에 치명적이라고 한다. 그래서 리모델링중 곰팡이가 발견되면 의무적으로 알리고 공사를 중단해야 한다. 알고도 공사를 진행하는 것은 불법이다. 그만큼 건강에 해롭다. 또 집 자체에도 치명적이다. 집을 지탱하는 기둥이 썩으면 돌이킬 수 없는 사태가 발생한다.물이 스며든 흔적이 발견되면 벽이든, 바닥이든, 천장이든, 어디든 침범된 부위는 모두 다 뜯는다. 기둥과 철골 등 기본 뼈대만 남겨놓고 모두 뜯어낸다. 수리 후 원상 복구하는 비용과 보수공사로 인한 불편 등, 손해가 막대하지만 예외는 없다. 작은 곰팡이라도 그대로 두면 주위로 퍼져 전이되기 때문에 뿌리째 뽑아야 한다. 결국 대대적인 리모델링은 불가피하다.우리 몸도 다르지 않다. 곰팡이와 유사한 암이 몸 안에 발견되면 수술은 불가피하다. 몸을 열어 암이 발견된 환부를 도려내지 않으면 암이 커지고 온 몸으로 전이되어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한다. 영혼을 병들게 하는 죄도 곰팡이와 같다. 밖으로 드러난 죄는 스스로도 감지할 수 있으니 조심할 수 있지만 내면 속 깊이 자리 잡고 있는 죄는 자신도 모를 수 있어 그대로 방치해 두면 영혼을 병들게 한다.하나님이 우리의 죄를 심도 있게 다루실 때가 바로 이때다. 평소엔 죄를 지어도 쉽게 용서해 주시고, 간과하시는 것 같지만 그 죄가 깊어져서 더 이상 내버려 두면 안 되는 지경이 되면 그때는 대대적으로 우리 죄를 다루신다. 그 문제가 근간에 이르면 치명적인 결과가 발생할 수 있어서 전인격적인 공사를 강행하신다. 깊은 곳에 자리잡은 죄를 들어내시기 위해 하나님은 날카롭게 허물을 하나씩 베어 내신다. 죄를 다루시는 과정이 매우 아프고 견디기 힘들어 삶이 송두리째 흔들리는 것 같은 시련을 지나기도 한다. 소망이 끊기고 재기하지 못할 것 같은 좌절감에 빠지기도 한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진노가 아니다. 우리를 벌하시는 과정이 아니다. 병든 우리의 내면을 해부하는 과정이다. 죄의 근간을 뽑아서 그것이 우리를 죽음으로 내몰지 않게 하기 위해서 막으시는 것이다. 썩은 살을 도려내고 새 살이 돋게 하는 치료의 과정과 같다. 죽어가는 영혼을 회복시키고 다시 재건하시는 치유와 회복의 과정이다. 또한 재건의 과정은 우리로 하여금 내면을 들여다보게 되는 계기가 된다. 뜯어낸 벽안을 들여다보듯이 우리 속안을 보게 되어 죄가 어떻게 침투했는지 원인을 알게 하고 다시 같은 일이 반복되지 않도록 조심하게 한다. 내 마음속 깊은 곳에 무엇이 자리 잡고 있는지, 내면은 어떻게 설계가 되어 있는지 들여다보며 스스로를 좀 더 알게 된다. 아픈 만큼 성숙해져서 이전 보다 더 의미 있는 삶을 살게 된다. 보수공사를 마칠 때까지 많은 불편을 겪어야 한다. 일을 제대로 할 수도 없고, 씻을 수도 없고, 건조를 위해 밤새 돌아가는 선풍기 소음으로 잠을 설친다. 그러나 공사가 끝나면 낡고 썩은 곳을 뜯어낸 자리가 재건되어 정상적인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된다. 우리를 병들게 한 곰팡이가 제거되었다는 확신으로 마음의 평안도 되찾게 된다. 다시 건강한 삶이 가능해진다. 이것은 축복의 재건이다.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약 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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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피니언] 신동식 칼럼 - 교회가 지역에 있는 이유 크리스천헤럴드2025.11.17
    교회는 구원받은 이들의 모임입니다. 이들을 성도라 부릅니다. 성도는 그리스도의 몸에 지체입니다. 그래서 성도는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 소명을 받았습니다. 그 근거는 예수님의 말씀에 있습니다. 예수님은 가이샤라 빌립보에서 제자들의 신앙고백을 들으시고 “내 교회”를 세우라는 사명을 받았습니다. 사도로 부름받은 이들에게 주어진 제자들에게 주어진 일은 교회세움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에게 준 지상명령이 제자를 삼고 세례를 베푸는 일입니다. 또한 승천하기 전에 하신 말씀이 땅긑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라고 했습니다.제자들이 명령을 받고 순종한 일이 바로 교회 세움입니다. 흩어진 유대인 기독교인들이 세운 첫 교회가 안디옥 교회입니다. 안디옥 교회는 서쪽으로는 바울과 바나바를 전도자로 보냈습니다. 그리고 동쪽으로는 도마·다대오·바돌로매 등을 파송했습니다. 그리고 바울이 갈라디아 지역에 교회를 세웠습니다. 빌립보 지역에 교회를 세웠습니다. 에베소 지역에 교회를 세웠습니다. 고린도 지역에 교회를 세웠습니다. 데살로니가 지역에 교회를 세웠습니다. 가는 지역마다 사명에 충실하게 교회를 세웠습니다. 동쪽으로 간 사도들 역시 교회를 세웠습니다. 그리고 아르메니아는 301년에 세계 최초의 기독교 국가가 됩니다. 교회가 세워지고 국교가 됐습니다. 이스라엘에서 유대인들의 반발이 있었습니다. 기독교인들이 박해 가운데 쫓겨났지만, 복음의 역사는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세워진 교회는 한 번도 쉬지 않고 예배를 드렸습니다. 물론 로마 교회라는 거짓 교회의 박해와 방해가 지속됐지만, 한번도 로마 교회 교인이 아니었던 사도교회 성도들의 열심으로 종교개혁을 준비했습니다. 그리고 마틴 루터에 의해 촉발된 16세기 종교 개혁은 참 교회로 회복을 가져왔습니다.우리의 신앙은 이러한 역사 속에서 존재하였습니다. 우리에게 첫 한글 성경을 가져다 준 로스는 스콜틀랜드 장로교회 선교사입니다. 존 로스는 위클리프의 신앙을 이어 받았습니다. 그래서 성경 중심의 신앙을 중심으로 선교사역을 했습니다.그 열매가 바로 존 로스의 누가복음입니다. 이 성경의 서문에 위클리프 성경이 영국에서 했던 일을 이 성경이 조선에서 할 것이라고 적었습니다. 위클리프는 성경을 기준으로 신앙생활에 임했던 윌라드의 영향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윌라드는 이미 8-12세기에 자체 성경을 가졌던 알비지역의 발도파였습니다. 이 발도파는 불가리아 보고밀파의 함께 참 교회를 세웠습니다. 보고밀파는 아르메니아의 바울파 성도들이 강제 이주를 통하여 세워진 교회였습니다. 이 유구한 역사의 흐름 가운데 오늘 우리 교회가 존재합니다. 교회는 선교단체가 아닙니다. 파라처치(para church)는 지역교회(local church)를 세우기 위해 존재합니다. 그래서 지역과 관계없습니다. 그러나 지역교회는 지역 목사와 함께 지역에 존재하면 성례와 권징을 시행합니다.  한때 발도파는 고난과 박해를 받을 때 생존을 위해 순회 설교자를 세웠습니다. 설교자들이 대부분 순교당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지역교회를 형상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종교 개혁으로 교회가 안정되자 지역교회와 목사를 세웠습니다. 그 역사는 지금도 진행 중에 있습니다. 교회는 지역에 존재합니다. 지역에 존재하는 것은 지역을 복음화시키고 건강한 지역으로 살리기 위함입니다. 지역에 교회가 있는 것이 기쁜 일이 돼야 합니다. 지역민들에게 교회가 있어서 좋다는 말을 들어야 합니다. 이것은 단기간에 이뤄지지 않습니다. 긴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지역에 오랜 시간을 버티어낸 교회가 있음에 감사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 교회도 그러한 반열에 들어서도록 힘써야 합니다.그러기 위해서는 기초가 튼튼해야 합니다. 믿음의 선배들이 전해준 성경중심의 신앙 솔라 스크립트라(오직 성경)이 분명해야 합니다. 성경이 말씀하면 내 생각을 멈출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교회는 터가 무너집니다. 터가 무너진 교회는 오래가지 못합니다.터가 튼튼한 교회는 지역과 함께 공존해야 합니다. 우리 교회는 우주적인 교회의 한 지체입니다. 지상교회는 모두 우주적 보편교회의 지체입니다. 그래서 지역에 있는 개별 교회들이 건강하게 자랄수 있도록 기도하고 섬겨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 교회가 건강하게 세워지고 보존되는 일입니다. 교회의 공교회성은 중요합니다. 물론 쉬운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의 교회는 공교회입니다. 이것이 모든 교회의 사명입니다. 공교회를 위해 분명하게 가지고 있어야 할 것은 성경과 신앙고백입니다. 그리고 사랑으로 교회를 세우는 일입니다. 기본적 세 가지가 잘 준비되면 지역 교회의 사명을 감당할 수 있습니다. 교회가 지역에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지역을 섬기는 것이 교회의 사명임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지역 교회의 본질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우리 교회는 지역교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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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피니언] The letter 16 김광근 - 하나님이 아끼시는자 크리스천헤럴드2025.11.17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수꾼의 깨어 있음이 헛되도다. 너희가 일찍이 일어나고 늦게 누우며 수고의 떡을 먹음이 헛되도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그의 사랑하시는 자에게는 잠을 주시는도다" - 시편 127장 1-2절우리는 왜 열심히, 부지런히 달리는데도 평안은 더디 올까요?시편 기자는 "여호와께서 세우지 .. 지키지 아니하시면.. 헛되도다"라고 단호히 밝힙니다. 혹, 우리의 문제는 '수고의 부족'이 아니라, '주권의 전도'에 있지 않을까요? 하나님 없이 세운 집은 시간의 균열을 피하지 못하고, 하나님 없이 지킨 성은 두려움이 스며들며 하나님 없이 새벽을 여는 근면은 끝내 "수고의 떡"만 먹는 삶이 됩니다.이 헛됨의 고리를 끊는 해답은 먼저의 전환'에 있습니다. 우리 주 예수께서는 일보다 먼저 아버지를 찾으셨습니다. "주께서 아끼시는 자"란 바로 십자가의 은혜 안에 머물며, 집과 성의 주권을 주께 돌려드리는 자입니다.신앙의 법칙은 간단합니다. "하나님을 먼저 구하는 자를 하나님이 아끼신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집의 머릿돌이 되시고 중심에 서실 때, 우리의 수고는 헛됨에서 해방되고 우리의 파수는 불안에서 자유하게 됩니다이제 우리의 하루 질서를 새롭게 합시다.오늘 해야 할 일 위에 "주여, 세우소서"를 기록하며 계획을 봉헌하고 결정의 문턱마다 "주여, 지키소서"를 속삭이십시오. 그리고 밤이 되면 "주께서 사랑하시는 자에게는 잠을 주시는도다" 말씀을 암송하며 염려를 내려놓으십시오.잠은 내가 아니라 주가 지키신다'는 믿음의 행위입니다. "먼저 하나님 그 다음에 모든 것"을 택할때, 우리의 수고는 의미가 되고 잠은 선물이 되는 복된 하루를 사시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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